Peter Paul Rubens(1577-1640)
E.H. 곰브리치_ 서양미술사
발전하는 시각 체계
17세기 전반기 : 가톨릭 교회권의 유럽
르네상스를 뒤이은 양식을 보통 바로크 (Baroque)라고 부른다. 그 이전의 양식들은 각각 뚜렷한 특징을 가지고 있어서 식별하기가 용이하였으나 바로크의 경우는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다. 그 이유는 르네상스 이후로 거의 오늘날까지도 건축가들은 원주, 벽기둥, 코니스, 엔타블레이처, 쇠시리 장식 등과 같은 동일한 기본 형태들을 사용해왔는데, 이것들은 모두 본래 고전 시대의 유적에서 빌어온 것이기 때문이다.
고딕- 처음에는 르네상스 시대의 이탈리아 미술 비평가들이 야만적으로 생각하는 양식임을 나타내기 위해서 사용한 것으로 로마 제국을 멸망시키고 로마의 도시를 약탈했던 고트 족이 이 양식을 이탈리아에 도입했다고 생각한 데서 비롯되었다.
매너리즘- 17세기 비평가들이 16세기 말의 미술가들을 미난하는 데 사용했던 가식과 천박한 모방이라는 본래의 의미로 남아 있다.
바로크- 17세기의 예술 경향에 대해서 반감을 가졌던 후대의 비평가들이 그것을 조롱하기 위해서 사용한 말이었다. 바로크라는 말은 사실은 터무니 없다든가 기괴하다는 의미로, 그리스와 로마 인들이 채택한 방법 이외의 다른 식으로 고전 건축의 형식을 차용하거나 채택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했던 사람들이 사용하던 단어였다. 이러한 비평가들에게는 고대 건축의 엄격한 규칙을 무시하는 것이 통탄할만한 취향의 타락으로 보였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이런 양식을 바로크라고 불렀다.
매너리즘의 막다른 골목에서 벗어나 회화가 그 이전 시대의 거장들의 양식보다 더 풍부한 가능성을 지닌 양식으로 발전하게 된 과정은 여러 모로 바로크 건축의 발달사와 비슷하다.
고전 시대의 조각상들에 의해 설정된 기준에 따라서 자연을 이상화하고 ‘미화하는’ 방침을 공식화한 사람들은 카라치와 레니, 그리고 그 레니의 추종자들이었다. 우리는 이것을 어떤 정해진 방법 같은 것에 아무런 구애를 받지 않는 고전 미술과 분명하게 구별하는 의미에서 신고전주의적(neo-classical), 또는 ‘아카데믹한(academic)’방침이라 부른다. 이에 대한 시비는 이내 끝날 것 같지 않다. 그러나 이러한 방법을 옹호한 화가들 중에 위대한 거장들이 있었음을 부인할 사람은 없다. 그 거장들은 우리들에게 순수함과 아름다움의 세계를 엿보게 해준다. 그러한 순수함과 아름다움이 없다면 세상은 보다 초라하게 느껴질 것이다.
‘아카데믹한’ 거장들 중에서 가장 위대한 사람은 프랑스 화가 니콜라 푸생( Nicolas Poussin : 1594-1665)이었다. 그는 로마를 제2의 고향으로 삼고 거기서 살며 작품을 제작했다. 푸생은 정열적으로 고전 시대의 조각상들을 연구했는데, 그것들의 아름다움을 통해 순수하고 장엄했던 고대 도시들에 대한 자신의 시각을 전달하고자 했다.
[아르카디아에도 나는 있다] 1638-39 ,파리 루브르
+ “아르카디아 목동(Les Bergers d’Arcadie)”란 제목이고, “아르카디아에도 나는 있다”라는 경구는 보통 ‘죽음을 기억하라(memonto mori)’는 의미로 해석되며, 인격화된 죽음이 말하는 것처럼 되어있다.
[아르카디아에도 나는 있다]는 이러한 부단한 노력의 결과로서 생겨난 유명한 작품 가운데 하나이다. 니 그림은 조용하고 햇빛으로 가득찬 남국의 풍경을 묘사하고 있다. 잘생긴 청년들과 아름답고 품위 있는 젊은 부인이 돌로 만든 큰 무덤 주위에 모여있다. 나뭇잎으로 관을 엮어 머리에 쓰고 지팡이를 들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이 젊은이들은 양치기들인 것 같다. 그들 중 한 명이 무릎을 꿇고 앉아서 무덤에 새겨진 명문을 해독하려고 하고 있으며, 다른 한 명은 명문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아름다운 양치기 여자를 돌아보고 있다. 그 여자는 맞은편에 있는 남자 목동과 같이 우수에 찬 표정으로 조용히 서 있다. 명문에는 라틴 어로 다음과 같이 써 있다. “아르카디아에도 나는 있다(ET IN ARCADIA EGO)” 나(ego), 즉 죽음은 목가적인 이상향인 아르카디아에도 의연히 군림한다는 뜻이다. 이제 우리는 무덤을 둘러싸고 묘비명을 읽고 있는 이 인물들의 두려움과 명상의 경의적인 몸짓을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인물들이 서로 반향하여 이루어내는 움직임의 아름다움은 더욱 감탄할 만하다. 전체 구도는 아주 단순해 보이지만 그 단순함은 심오한 미술적인 지식에서 생겨난 것이다. 그러한 지식만이 죽음의 공포가 말끔히 가신 조용한 휴식의 이러한 회고적인 정경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것이다.
이와 동일한 회고적인 아름다운 분위기를 그린 작품으로 유명해진 사람은 이탈리아로 귀환한 또 한 사람의 프랑스 화가였다. 그는 클로드 로랭(Claude Lorrain:1600-82)으로 푸생보다 여섯 살 아래였다. 로랭은 캄파냐(로마 평원), 즉 아름다운 남부의 색조 속에 위대한 과거를 연상시키는 장엄한 유적들이 잇는 로마 주변의 평원과 언덕들을 열심히 스케치했다. 그는 푸생처럼 자연의 사실적인 표현에 있어서 완벽한 기량을 그의 스케치에서 보여주고 있다. 그가 그린 나무의 습작들은 보기만 해도 즐겁다. 그러나 본격적으로 완성시킨 그림과 동판화에서는 과거의 향수어린 꿈과 같은 정경 속에 들어갈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되는 소재들만을 선택했다. 그는 화면 전체의 장면을 현시로가 다르게 보이게 만드는 금빛 광선이나 은빛 대기 속에 이 모든 것들을 무르녹아 들어가게 묘사했다.
[아폴론에게 제물을 바치는 풍경], 클로드 로랭 1662-3, 케임브리지셔 앵글시 사원
자연의 숭고한 아름다움에 처음으로 사람들의 눈을 뜨게 만든 화가는 바로 클로드 로랭이었고, 또 그가 죽은 뒤 거의 백 년쯤 되었을 때 여행객들은 그의 기준에 따라서 실제의 풍경을 평가하곤 했다. 만약 어떤 풍경이 클로드가 그려보여준 시각 세계를 그들에게 연상케 하면 그들은 그것을 아름답다고 찬미하고 거기에 앉아서 야유회를 즐기곤 했다. 부유한 영국인들은 한 걸음 더나아가 아름다움에 대한 클로드의 꿈을 모델로 해서 그들의 소유지 내의 정원에 자기들만의 소자연을 꾸며놓으려고까지 하였다. 이탈리아에 정착하여 카라치의 방침을 그대로 실천한 이 프랑스 화가의 영향은 이런 식으로 영국의 아름다운 전원 풍경들 속에 나타나게 되었고 거기에는 이 화가의 사인이 들어갈 만하였다.
북유럽 사람으로 카라치나 카라바조 시대의 로마의 분위기를 가장 직접적으로 접한 화가가 있었다. 그는 바로 플랑드르 출신의 패터 파울 루벤스(Peter Paul Rubens :1577-1640)로 푸생과 클로드보다는 한 세대 위였고 귀도 레니와는 비슷한 연배였다. 1600년 그는 가장 감수성이 예민한 스물세 살의 나이로 로마로 왔다. 그는 로마뿐만 아니라 (그가 얼마 동안 머물렀던) 제노바와 만토바에서도 미술에 관한 많은 열띤 논쟁을 귀담아 들었으며 또 많은 고금의 명작들을 연구하였던 것이 틀림없다. 그는 예리한 관심을 가지고 듣고 배우긴 했으나 어떤 ‘운동’이나 유파에 가입한 것 같지는 않다. 그는 기질적으로 여전히 플랑드르 인이었고, 반 에이크와 로지에르 반 데르 웨이든 및 브뢰헬을 배출한 나라의 화가였다. 네덜란드 출신의 이들 화가들은 항상 다채로운 사물의 표면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옷감과 살아 있는 신체의 감촉을 표현하기 위해서, 다시 말하자면 눈으로 볼 수 있는 모든 것을 가능한 한 최고로 충실하게 그리기 위해서 그들이 알고 잇는 모든 기법과 수단을 이용하려고 노력했다. 그들은 이탈리아 화가들이 그렇게 신성시했던 아름다움의 기준에 대해서는 별로 개의치 않았으며, 또 품위 있는 주제에 대해서도 별로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루벤스는 이러한 전통 속에서 성장했기 때문에 이탈리아에서 전개되고 있던 새로운 미술에 대해 경탄했지만 그의 본질적인 신념, 즉 화가의 임무는 자기 주위의 세계를 그리며,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그림으로써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화가 자신이 사물의 생동감 넘치는 다양한 아름다움을 즐긴대로 느끼게 해주는 일이라는 신념이 흔들리지는 않았던 것 같다. 이러한 접근 방법으로 보면 카라바조의 예술이나 카라치의 예술은 서로 모순되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루벤스는 카라치와 그의 유파가 고전적인 전설과 신화를 그림의 주제로 그리는 것을 부활시키고 신자들을 교화시키기 위해서 감동적인 제단화를 구성한 방법을 높이 평가했다. 동시에 그는 카라바조가 자연을 연구할 때 보인 타협없는 성실성 또한 높이 평가했다. 1608년에 안트웨르펜으로 돌아왔을 때 루벤스는 31세의 청년으로 이탈리아에서 배울 수 있는 것은 다 배웠다. 그는 붓과 물감을 자유자재로 구사하여 나체이든 옷을 입은 인물이든, 또한 갑옷이나 보석, 동물이나 풍경 등을 탁월하게 묘사하였으며 대규모의 작품을 거침없이 구성할 수 있는 기량을 쌓았다. 사실상 알프스 이북에서 그에게 필적할 만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 이전의 플랑드르 화가들은 대부분 작은 그림만을 그렸다. 그런데 그는 이탈리아로부터 교회와 궁전을 장식하기 위한 거대한 화면을 선호하는 취향을 플랑드르에 도입했는데, 이것은 당시의 고관대작들과 군주들의 취향에 잘 들어맞았다. 그는 거대한 화면 속에 인물들을 배치하고 전체의 효과를 높이기 위해서 빛과 색채를 구사하는 기술을 공부했다.
[성인들의 경배를 받고 있는 성모과 아기 예수]페터 파울 루벤스, 1627-28
이 도판은 안트웨르펜의 한 교회당의 주제단을 장식할 그림의 습작으로 그가 이탈리아 선배 화가들의 작품을 얼마나 잘 연구했으며 또 그들의 이념을 어마나 대담하게 발전시켰는지를 보여준다.
이 그림에서는 벨리니의[성모],티치아노의 [페사로의 성모]와 같은 유서 깊은 테마인 성인들에게 둘러싸인 성모의 주제를 어떤 그림에서보다도 더 많은 움직임과 빛, 그리고 훨씬 공간감이 넘치고 있으며 더 많은 인물들이 등장하고 있다. 성인들은 축제의 인파와도 같이 성모의 높은 왕좌로 모여들고 있다. 전경에는 성 아우구스티누스 주교와 순교할 때의 불에 달군 석쇠를 들고 있는 성 로렌스, 그리고 토렌티노의 성 니콜라우스 수사가 보는 사람들의 시선을 그들의 예배의 대상인 성모에게로 이끌고 있다. 용을 누르고 있는 성 게오르기우스와 화살과 화살통을 곁에 두고 있는 성 세바스티아누스는 열렬한 감정으로 서로의 눈을 들여다보고 있는데 전사 한 사람이 순교의 상징인 종려 나무 잎을 손에 들고 왕좌 앞에 막 무릎을 꿇으려 하고 잇다. 수녀 한 사람이 포함된 한 무리의 여인들이 황홀하게 주 장면을 올려다보고 있다. 그것은 아기 예수가 성모의 무릎위에서 몸을 굽혀 한 어린 소녀에게 반지를 주려고 하는 장면이다. 작은 천사하나가 반지를 받으려는 소녀를 도와주고 있다. 이 그림은 성 카타리나의 약혼의 전설을 묘사한 것이다. 성 카타리나는 환상 속에서 이러한 장면을 보고 그녀 자신을 그리스도의 신부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왕좌의 뒤에는 자애로운 시선으로 이를 바라보고 있는 성 요셉이 있고 열쇠를 들고 있는 성 베드로와 칼을 들고 있는 성 바오로는 깊은 생각에 잠긴 채 서 있다. 그들은 맞은편에 홀로 서서 빛을 가득 받으며 무아의 지경으로 경배하며 두 손을 높이 들고 서 있는 당당한 성요한의 모습과 좋은 대조를 이루고 있다. 한편 귀여운 두 천사가 멈칫거리는 작은 양을 왕좌로 올라가는 계단으로 끌어올리고 있다. 하늘에는 또 한 쌍의 천사들이 성모의 머리에 씌워줄 월계관을 들고 내려오고 있다.
이렇게 세부를 잘 사펴보고 난 뒤에 다시 한번 화면을 전체적으로 보면 루벤스가 붓을 크게 휘둘러서 이처럼 많은 등장 인물들을 한데 묶고 또 즐겁고 축제와 같은 장엄한 분위기를 주고 있는 것에 감탄을 금할 길이 없다. 이처럼 거대한 화면을 그처럼 확고한 관찰력과 손재간으로 계획할 수 있는 이 거장에서 혼자서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많은 그림 주문이 쇄도했다는 것은 하나도 놀랄 일이 아니다. 그러나 그는 그러한 주문이 쇄도했다는 것에 대해 전혀 걱정하지 않았다. 루벤스는 대단히 큰 조직력을 가진 사람이었고 또 개인적으로도 매력이 넘치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플랑드르의 많은 재능 있는 화가들이 그의 밑에서 일을 하며 그에게서 배우는 것을 자랑으로 생각했다. 교회나 유럽의 여러 나라 왕이나 군주로부터 새로운 주문을 받으면 그는 채색을 한 작은 스케치만을 그릴 때가 많았다
[성인들의 경배를 받고 있는 -]은 대작을 위한 그런 채색 스케치 중의 하나이다. 그러한 스케치에 담긴 구상을 큰 화폭에 옮기는 일은 그의 제자들이나 조수들이 할 일이었고, 그들의 스승의 구상대로 밑그림을 그리고 채색을 마치면 그제서야 루벤스가 붓을 들고 얼굴이나 비단 옷에 손질을 하거나 거칠게 대조가 되는 부분들을 부드럽게 완화시키곤 했다. 그는 자신의 손길이 닿기만 하면 모든 것이 당장 생기를 띠게 된다고 확신했는데 사실상 그의 생각이 옳았다. 왜냐하면 그것이 바로 루벤스 예술의 가장 큰 비밀이었다. 마술사와 같은 그의 솜씨는 모든 것을 생기 발랄하게 하고 강력하고 유쾌하게 살아 숨쉬는 것으로 만들 수 있었다. 이와 같은 그의 완벽한 기량은 그의 간단한 소묘 작품
[아이의 얼굴] 1616, 루벤스의 딸 클라라 세레나로 추정, 파두츠 리히텐슈타인 왕실 소장품.
이나
재미
삼아
그린
그림들에서
가장
잘
드러난다
. 작은
소녀의
얼굴인데
아마도
루벤스의
딸인
것
같다
. 이것은
구도상의
복잡한
기교도
없으며
화려한
의상이나
흘러내리는
빛도
없는
단순한
소녀의
정면
초상일
뿐이다
. 그런데도
이
그림은
살아
있는
사람처럼
숨을
쉬고
맥박이
고동치고
있는
듯하다
. 이
그림과
비교해보면
그
이전
시대의
초상화들은
예술
작품으로서는
제아무리
위대하다
할지라도
어쩐지
실물과
거리가
멀고
비현실적으로
보인다
. 루벤스가
어떻게
해서
이
생기
발랄한
생명력의
인상을
만들어냈는지
분석해보려는
것은
부질
없는
일이다
. 그러나
그것은
아마도
입술의
물기를
암시하고
또
얼굴과
머리카락을
입체적으로
표현하는
데
사용한
대답하고
섬세한
빛의
효과와
분명히
관계가
있을
듯싶다
. 그
이전의
티치아노보다도
루벤스는
한층
더
붓질을
그의
가장
중요한
수단으로
사용했다
. 그의
그림들은
이제
더
이상
세심하게
입체감을
표현한
채색
소묘는
아니다
. 그것은
소묘적인
수단에
의해서가
아니라
‘회화적인
’ 수단에
의해서
생겨난
것이며
그
점이
생명감과
활력의
느낌을
더욱
강조해
주는
것이다
.
루벤스에게 그 이전의 어떤 화가도 누려보지 못한 명성과 성공을 거두게 만든 것은 거대하고 다채로운 화면을 손쉽게 구상하는 천부적 솜씨와 그 속에 활기가 충만하게 떠돌 수 있게금 하는 비할 데 없이 탁월한 재간과의 조화에 있었다. 그의 예술은 궁정의 사치와 화려함을 더욱 돋보이게 하고 그러한 왕족들의 권력을 미화하는 데 대단히 적합했다. 그래서 당시의 이러한 영역을 그가 혼자서 독점하고 있는 듯한 느낌도 든다. 그 당시는 유럽의 종교적 사회적 긴장이 대륙 전역에서는 무서운 ‘30년 전쟁’으로, 그리고 영국에서는 내란으로 절정에 달해 있었다. 한쪽에는 가톨릭 교회의 지지를 받는 절대 군주들과 그들의 궁정이 있었으며 다른 편에는 대부분이 신교도인 신흥 상업 도시들이 발흥하고 있었다. 네덜란드 자체도 스페인의 ‘가톨릭’ 지배에 저항한 신교 국가인 홀란트와 스페인과의 동맹하에서 안트웨르펜의 지배를 받는 가톨릭 교의 플랑드르로 양분되어 있었다. 이 가톨릭 전영의 화가로서 루벤스는 독자적인 지위에 올라섰다. 그는 안트웨르펜의 예수회 교단, 플랑드르의 가톨릭 교 통치자들, 그리고 프랑스의 국왕 루이 13세와 그의 교활한 모친 마리아 데 메디치, 스페인의 국왕 펠리페 3세, 그리고 그에게 작위까지 하사한 영국의 국왕 찰스 1세로부터 많은 그림 주문을 받았다. 그는 이렇게 귀빈 대접을 받으며 한 왕실의 궁전으로부터 다른 궁전으로 이동해 다니면서 때로는 미묘한 정치 외교적인 임무를 맡기도 했다. 그 중에서 제일 유명한 것이 소위 ‘보수’동맹을 위해서 영국과 스페인을 화해시킨 일이다. 그런 중에도 그는 당대의 학자들과 접촉을 유지하고 고고학과 예술에 관한 문제에 대해서 해박한 라틴 어로 서신을 교환했다. 귀족임을 암시하는 검을 차고 있는 그의 자화상은 그가 자신의 독특한 지위를 얼마나 의식하고 있었는지를 보여준다.
[자화상] 1639년경, 빈 미술사 박물관
그러나 그의 매서운 눈매에는 자만심이나 허영심 같은 것은 보이지 않는다. 그는 어디까지나 진정한 예술가였다. 이러한 동안에도 그의 안트웨르펜에 있는 작업실에서는 휘황찬란한 대작들이 엄청나게 많이 쏟아져 나왔다. 그의 손을 통해서 고전적인 우화와 우의적인 이야기들이 그의 딸의 초상처럼 실감나게 살아 있는 모습으로 표현되었다.
우의화는 보통 다소 따분하고 추상적인 것으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루벤스의 시대에는 그것이 사상을 표현하는 편리한 하나의 수단이 되었다.
[평화의 축복에 대한 알레고리] 1629-30년경, 런던 국립 박물관
+말하자면 평화라는 것이 얼마나 축복인지 보여주는 우회적인 그림.알레고리는 우의, 풍유를 뜻하는 말로 추상적인 개념을 직접 표형하지 않고 다른 구체적인 대상을 이용하여 표현하는 원래 문학에서 사용된 방식이다.
이것은 루벤스가 스페인과의 화평을 설득하고자 영국 국왕 찰스 1세에게 선물로 가져갔던 것이라고 한다. 이 그림은 평화의 축복을 전쟁의 공포와 대조시키고 있다. 지혜와 예술의 여신인 미네르바는 막 퇴각하려고 하는 군신 마르스를 쫓아내고 있는데, 군신의 무시무시한 동료인 전쟁의 신 퓨리는 이미 등을 돌리고 있다. 미네르바의 보호 아래 결실과 풍요의 상징으로서 평화의 기쁨이 우리들 눈 앞에서 전개되고 있다. 이러한 구상은 루벤스만이 해낼 수 있는 그 특유의 것이다. 평화의 여신은 아이에게 젖을 주려하고 있고 반인반수의 목신은 먹음직한 과실들을 더없이 행복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다. 술의 신 바코스를 섬기는 여사제들은 금과 보석을 가지고 춤을 추고 있으며 큰 고양이처럼 평화스럽게 장난을 치고 있는 표범이 있다. 그 반대쪽에는 전쟁의 공포에서 평화와 풍요의 안식처로 도망온 겁에 질린 표정을 한 세 어린이들에게 한 젊은 수호신이 왕관을 씌워주고 있다. 이 그림의 풍부한 세부 묘사와 생생한 대조들, 빛나는 색채에 몰입되어 보게 되면 이러한 구상들이 루벤스에게 있어서는 맥빠진 추상으로서가 아니라 박진감 넘치는 현실로 생각되었다는 것을 금방 알아차릴 수 있다. 루벤스를 사랑하고 이해할 수 있으려면 먼저 그의 작품에 익숙해져야 한다는 이유는 아마도 이러한 성질때문일 것이다. 고전적인 아름다움의 ‘이상화’된 형태가 그에게는 무용지물이었다. 그런 형태들은 그와는 거리가 멀고 추상적인 것이었다. 그가 그린 남자와 여자들은 그가 실제로 보고 좋아했던 살아 있는 사람들이었다. 어떤 사람들은 그의 그림에 등장하는 ‘뚱뚱한’ 여인들을 보고 못마땅해 하겠지만 당시의 플랑드르에서는 날씬한 몸매가 유행이 아니었다. 물론 이런 비평은 미술과는 별 상관 없는 것이며 따라서 그 점은 너무 심각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그러한 비난이 너무 자주 행해지기 때문에, 그의 모든 작품 속에 나타나있듯이 활기차고 떠들썩한 삶을 즐기는 그의 태도가 루벤스를 단순한 기예의 대가 이상으로 만들었다는 사실을 알아두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러한 인생에 대한 환희야말로 그의 작품들을 화려한 바로크 풍의 단순한 실내 장식으로 타락시키지 않고 미술관의 차디찬 공기 속에서도 여전히 생명력을 가지고 있는 걸작품으로 남아 있게 만든 것이다.